2022년, 28명의 말랑하고 귀여운 나만의 마니또들에게 온 마음을 빼앗겼다. 그들은 초췌한 나를 연예인처럼 그려주었고 담임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다. 비문이 잔뜩 섞였지만 진심이 담긴 편지들을 책상 위에 몰래 올려두고 매일 아침 내 출근을 기다렸기에, 나 또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연차였던 내가 조금이나마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을까 고민하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자격증 준비를 학급 특색사업으로 내걸게 되었다.
마침 부산광역시교육청 사제동행 동아리 공문이 눈에 띄어 계획서를 써냈고, 예산을 지원받아 부산 역사 체험학습 비용으로 지출했다. 그러나 기본 개념서와 문제집을 학생 각각 2권까지 주기엔 남은 예산이 다소 모자랐다. 충동적으로 EBS 최태성 강사에게 후원을 부탁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마침 초등학생용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를 발간하여 출판사의 홍보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 덕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6급을 목표로 5월부터 시험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함께는 처음 준비하는 시험이었기에 서툴렀지만, 조선의 길고 긴 역사 강의를 해도 내 앞에서는 고맙게도 어떤 학생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어쩌면 뒤에서 많은 뒷담화가 오갔을 수 있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벼대며 공책에 필기하고, 친구와 문제를 내고 답변하며 자습했다. 방과후 시간에는 학생들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남아 모의고사를 풀고, OMR카드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응답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창의적체험활동 시간에 늘 했었던 교실 놀이가 생략되었지만 내 짝이 공부하는데 나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듯했다.
드디어 한국사 시험 D-1, 벼락치기가 시작됐다. 아침에는 한국사 시험에 자신감이 붙은 학생이 앞으로 나와 쪽집게 강의를 했다. 점심시간에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무릎에 책을 올려두고 공부를 하는 아이, 스스로 만든 요약 노트를 달달 외우는 아이, 기출문제를 푸는 아이 등 기세는 대한민국 고등학생과 비등했다. 그날 저녁 8시까지 대부분이 학원을 빼고 학교에서 함께 마지막 준비를 했다. 어두컴컴한 저녁이 되어 같이 교실 불을 끄고 집에 가는 길에 내심 뿌듯하다며 어깨가 잔뜩 올라간 모습들이 기억에 남는다.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대견하던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대망의 시험 날. 수능장에 입장하는 수험생처럼 잔뜩 긴장한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하나씩 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정말 기특해.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오늘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너희의 생각보다 너희는 훨씬 더 대단한 존재들이란다." 수험장 위치를 확인한 후 마지막 오답 정리 공책을 손에 들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고3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달까?
특히나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사 4급 자격증을 얻었던 학생이 비밀스럽게 준 쪽지를 편지 박스에서 오랜만에 꺼내본다. 선생님의 잔소리가 가끔은 지겨웠지만, 함께 공부를 하고보니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는 한 문장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이초 선생님의 슬픈 소식 이후로 크게 바뀌지 않는 교직 문화에 많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여전한 악성 민원과 교사를 향한 맹목적 불신이 종종 열정을 꺼트리게 하지만, 소중한 제자를 바라보며 하루 하루 버틴다. 나는 아직 내면의 불씨를 살리고픈 대한민국 초등교사이기 때문이다.
부산교육신문에 기재된 기고문은 필자의 견해이며 부산광역시교육청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